- 특집
- 2014/12 창간준비2호
51:49의 정치지형과 진보진영에 필요한 변화
그 시대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숫자들이 있다. IMF 경제위기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고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자 ‘20:80 사회’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러더니 10여 년이 지난 후 이제 한국사회는 ‘1:99 사회’라고들 한다. 세계경제위기 이후 “우리가 99퍼센트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이 일어나면서 유행한 말이다.
20:80이나 1:99가 부의 집중과 불평등을 지적하는 함축적 표현이라면, 최근 한국의 정치 상황은 ‘51:49 사회’로 표현된다. 2012년 대선에서 51.6퍼센트 득표율을 얻은 박근혜 후보가 48퍼센트를 얻는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후 유행하기 시작한 이 표현은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성을 더해갔다. 안철수 영입에도 불구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율은 개선되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정부와 새누리당에게 불리한 세월호 국면을 통과하면서도 6.4 지방선거과 7.30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이 연이어 승리했다.
51:49 사회
집권 만 2년이 되어가는 현재까지 국정지지율은 상당히 안정적인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45~50퍼센트 정도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기관 대선 개입 논란과 검찰수사 무력화, 철도민영화 시도와 민주노총 사무실 침탈, 최근의 사이버 사찰 등 정부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통치 행태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다. 이로 인해 여론조사 결과를 아예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론조사 기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가 바람직해보이진 않는다. 여론조사 기관이 제공하는 수치가 정확하진 않더라도 추세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 조사 기법의 한계로 여론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정신승리’보다는, 이미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음에도 왜 안정적 지지세가 유지되는지 이해하려는 태도가 현재의 정치지형에서 훨씬 유익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역설
현실의 역설적인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보자. 일단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공약을 여러 건 파기했다는 사실은 모든 국민이 알고 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대통령이 여전히 신뢰의 표상이다. 수차례 선거를 치르면서 유권자들에게 공약 이행에 대한 기대가 애초부터 별로 없었던 탓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철도·의료민영화, 세월호 참사와 같은 국내 사안이나, 대북·대일관계 등 외교문제에 신중하고 비타협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고, 이것이 신뢰의 원천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하나의 역설은 실질적으로 민생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대통령이 민생을 챙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민생을 챙기려고 하지만, 정쟁만 일삼는 국회에서 법안 처리가 이뤄지지 않아 경제활성화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식의 선동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 정부와 새누리당의 적절한 역할분담이 톡톡한 효과를 보고 있다. 특히 비박계인 김무성 대표 체제 이후, 때로는 새누리당이 청와대의 지나친 불통을 비판하기도 하고 때로는 청와대가 새누리당까지 싸잡아 정쟁국회라고 비판하면서, 민생챙기는 대통령과 책임 있는 집권여당이라는 윈윈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무능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무능의 늪에 빠졌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 새누리당, 심지어 장외 보수단체들과도 끊임없이 부딪히며 싸우기는 하지만 정작 얻어내는 것이 거의 없다.
세월호 특별법 투쟁 과정에서 가장 큰 교란 요소 역시 새정치민주연합이었다. 초반 대학 특례입학이나 의사자 지정 이야기를 꺼낸 것부터 큰 패착이었다. 이는 보수세력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빌미가 되어, 유가족의 진상규명 요구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게다가 초기에는 여야 협상에서 절대 관철될 수 없는 불가능한 요구, 즉 박근혜와 김기춘을 조사하겠다는 정치 캠페인으로 일관하다가, 시간이 흘러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급하게 합의를 맺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최근에도 웃지 못할 코미디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10월 말 안철수 전 대표는 “지금 돌아보면 후회되는 것이 제 전문 분야가 아닌 ‘정치개혁’을 들고 나온 것”이라며 앞으로는 경제와 교육 분야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본인이 주장해 온 ‘새정치’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한 새정치민주연합 창당, 이 모든 것이 지방선거를 앞둔 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셈이다. 그럼 남아있는 당명은 어쩌라는 말일까. 그러더니 11월 들어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 반기문 영입설이 오르내리고 있다. 외부인사 수혈이나 당명 개정 같은 이벤트 없이는 생존불가능하다는 고백일 것이다.
보수적 정치지형
안타깝게도 ‘신뢰 대 혼란’ ‘민생 대 정쟁’이라는 51:49 사회의 역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프레임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신자유주의를 본격 도입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였다. 이들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고,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을 방패삼아 사회적 저항을 무마하거나 억압하는 데 있어 보수 세력보다 유리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는 시점이다.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누구하나 뚜렷한 대안을 말하지는 못하는 시대다. 대안 없는 세계를 관리해 나가는 데 있어 더 유리한 것은 보수 세력이 아닐까(김정한, 「박근혜 정부의 통치전략: 헤게모니 없는 배제의 정치」, 『문화과학』, 2014년 봄).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비단 새정치민주연합만이 아니라 진보운동 전반의 위기로 이어진다. 정쟁, 혼란, 떼쓰기, 발목잡기와 같은 부정적 어휘들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정치지형에서는 효과적이지 않은 운동패턴이 반복되면서 진보진영은 외연을 넓히거나 조직적 힘을 강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진영의 부정적 패턴
중요한 문제는 진보진영 내에 박근혜 정부와 그 지지자를 극단적이고 퇴행적인 보수 세력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만연하다는 점이다. 이는 신뢰의 대통령, 민생을 챙기는 대통령이라는 역설을 무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박근혜 정부와 그 지지자 중에는 물론 극단적 세력이 존재하지만 이는 그 일부일 뿐이다. 그들은 훨씬 더 폭넓은 중도층을 끌어안고 있는 중도보수 연합세력이다.
만약 이렇게 인식한다면, 박근혜 정부는 51퍼센트의 폭넓은 지지층에 의해 뒷받침되는 탄탄하고 강한 존재이고 따라서 대응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행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반박근혜 집회를 개최하는 패턴으로는 51:49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현재 진보세력의 최대치가 49퍼센트라면 어떻게 진보적 가치를 확산하고 운동의 저변을 넓힐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표에 기여하는 한에서 반박근혜 정치투쟁도 의미가 있다.
진보진영의 일상활동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당연시되어 온 진보진영의 습관이 있다. 진보진영 내 토론문화, 집회문화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 49퍼센트만의 잔칫집 분위기다. 이명박을 쥐새끼(쥐박이)로 박근혜를 닭대가리(닭근혜)로 묘사하면서 정신승리에 그치고 마는 진보진영 내 문화가 온존하는 한 운동의 확장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외연은 좁아지고 반격의 빌미만 늘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015년,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지난 11월 초 새정치민주연합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에서 눈에 띄는 보고서가 나왔다. <‘박근혜 정치’를 넘어서>라는 이 보고서는 그 동안 새정치민주연합의 활동 방식에 대한 반성, 그리고 향후 3년간의 대응전략을 담고 있다. 그 결론은 “새정치민주연합은 대통령 박근혜가 무엇을 하든 오직 국민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쟁의 이미지를 벗고, ‘신뢰’와 ‘민생’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이다.
판단의 전제는 향후 정세에 대한 냉정한 전망이다. 그 동안 새정치민주연합은 박근혜 정부에 불리한 쟁점이 불거질 때마다 은연중에 조기 레임덕이 시작될 것처럼 정세를 판단하고 움직여왔다. 하지만 보고서는 더 이상 이런 패턴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고 제언한다. 이는 현재 진보진영 일각에 회자되고 있는 2015년 박근혜 레임덕론에 비해서 훨씬 객관적인 정세전망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망이 객관적이라고 해서 대안이 뚜렷한 것은 아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대통령이 무엇을 하든 국민만 생각한다’는 의지를 어떤 정책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소득주도성장 같은 담론들 그 자체의 한계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미 정부와 새누리당이 이러한 담론을 변형·왜곡하여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새정치민주연합에게 불리한데, 가령 여당은 복지를 현실가능한 속도로 추진하는 세력으로, 반면 야당은 무리하게 추진하는 세력으로 구분될 뿐 대중적으로는 근본적인 차별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15년은 선거가 없는 해다. 이는 새정치민주연합의 구심력을 더욱 약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의 각 계파들이 2015년 한 해 동안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할 경우, 분당이나 신당창당 같은 변수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어차피 2016년 총선이나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재합당이 이뤄질 것이라는 계산 아래 각 계파별 몸집불리기가 현실적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 프로그램이 작동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곤란함에 빠진 것이 비단 새정치민주연합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진보운동 역시 51:49라는 정치지형에 적합하도록 운동을 기획하는 패턴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2015년 진보운동 내에서 정세인식을 돌아보고 대안적인 담론과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토론하며 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기획을 구체화하는 등 다양한 측면에서 진지한 논의와 실천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