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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
  • 2014/12 창간준비2호

저성장 시대, 박근혜식 해법의 모순

  • 김유미 사회진보연대 정책선전위원
올 초 기획재정부가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없다고 가정한 각종 경제지표를 산출하여 청와대에 보고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그러자 기획재정부는 ‘특정기업에 대한 경제력 집중 대책을 다루기 위한 것은 아니며 위기관리 차원에서 산출해본 것 뿐’이라고 대기업들을 안심시켰고,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여 지표를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이 에피소드는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한국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두 재벌의 성장이 가리고 있는 한국경제의 침체(경제지표의 착시효과)가 심각한 수준임을 짐작하게 한다. 

재벌로의 쏠림 현상은 2000년대 들어 더욱 심해졌다. 한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10대 재벌의 매출 비율은 2002년 53퍼센트에서 2012년 84퍼센트까지 치솟았다. 특히 ‘빅2’로 불리는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에도 눈부신 성장을 이어갔다. 2001년과 2013년을 비교하면 삼성그룹은 130조 매출에 8조 순익에서 303조 매출 30조 순익으로, 현대차그룹은 36조 매출 1조 순익에서 164조 매출 13조 순익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재벌의 고성장이 지속불가능하다면? ‘경제민주화’ 담론의 주장대로 재벌의 고성장을 사회 전체가 고루 나누어 함께 잘 살 수 있다면 그거야 좋은 일이겠지만, 그런 변화가 준비되기도 전에 한국 재벌의 성장 동력이던 수출제조업이 성장 정체를 맞이하게 된다면 그 뒤의 한국경제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지금 그런 질문 앞에 놓여 있다. 
 

경제성장의 동력, 수출제조업의 성장 둔화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2014년 3분기 제조업GDP는 2009년 1분기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이 애플이나 샤오미와 같은 경쟁사 제품에 밀리며 수출이 감소한 것,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의 실적 부진이 이익 감소의 요인으로 꼽힌다. 문제는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엔화 약세와 중국 제조업의 성장 등 수출에 불리한 여건이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세계적으로 스마트기기와 자동차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뿐만 아니라 수출제조업 전반의 매출증가율과 수익증가율이 둔화되고 있다. 지난 2013년 제조업의 매출 증가율은 0.5퍼센트로 통계 집계를 시작한 1961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였다.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2008년 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활력을 잃고 장기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데에 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여느 때와 같이 ‘수출(또는 시장개방)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을 꾀하기 어려운 조건에 놓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계경제위기 이후 몇 년간 이어진 한국 재벌의 고성장이야말로 대내외적 호조건 속에 일시적으로 가능했던 ‘이례적 성장’이라 할 수 있다. 경제연구소들은 최근까지 이어졌던 대규모의 경상수지 흑자가 앞으로 축소될 것이라 예측한다. 
 

내수 활성화라는 목표와 제약조건

집권 이후 박근혜 정부는 ‘내수’를 굉장히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권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경제적 조건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올 7월 취임한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제시한 3대 정책방향 - 내수 활성화, 민생 안정, 경제 혁신 - 중 핵심은 확장적 재정정책과 규제완화 조치(LTV, DTI 등 부동산 규제완화가 대표적)로 당장 국내에 돈이 돌게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은행도 두 차례에 걸친 금리인하로 보조를 맞추었다. 실제로 2014년은 수출과 내수가 한국경제의 성장에 기여하는 비율이 역전된 해이다. 내년에도 내수의 성장기여도는 수출을 앞지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내수를 끌어올려 경제를 살리는 데에는 만만치 않은 제약조건들이 존재한다. 첫째,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가 낮다. 장기적으로 경기가 살아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이 없으니 경제주체들이 투자나 소비에 소극적이 된다. 둘째, 실질소득 자체가 너무 낮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소득불평등이 심하고, 특히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이 높다. 세계경제위기 이후엔 실질임금의 정체도 계속되고 있다. 셋째, 가계부채가 포화 상태에 이르러 소득이 늘더라도 소비보다는 부채 상환에 들어가는 비중이 높다. 넷째,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하면서 생산 및 소비의 여력이 함께 줄어든다. 

각각의 문제들은 새로운 쟁점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실질적으로 성장을 제약할 수준에 이르고 있다. 2015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은 이처럼 뚜렷해진 구조적 문제들에 대응하는 데에 중점을 둘 것이다. 
 

‘창조적인’ 규제완화와 민영화가 이어질 것

박근혜 정부의 첫 번째 대응은 기존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과 함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만한 산업을 찾는 것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최근 “천문학적인 양적완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구조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해 흔들리는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며 2015년에는 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에 힘쓰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정부가 작년과 올해 추진해 왔던 ‘공공부문 정상화’나 ‘창조경제’와 맥을 같이한다.

창조경제란 한국경제를 이끌어갈 신성장동력을 찾는 데에 투자하겠다는 것인데, ‘수출/제조업/대기업’ 중심에서 ‘내수/서비스업/중소기업’ 중심으로 한국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겠다는 정부의 목표와도 연관이 깊다. 정부는 창조경제의 대상인 ‘고부가가치 서비스업’ 중에서도 의료서비스에 대한 규제완화를 가장 빠르게 추진해 왔다. 올 한해 동안 병원의 영리자회사 추진, 영리법인약국 허용, 원격의료 허용, 병원의 부대사업 업종 확대 등 수많은 규제완화 법안과 자의적인 행정해석이 마련되었다. 의료산업은 고령화 시대에 크게 팽창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벌써 삼성, SK 등 재벌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분야이다. 

의료에 이어 2015년에는 금융, 교육, 노동 부문의 개혁을 꾀하겠다는 것이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11월 21일 ‘제2기 중장기전략위원회’의 출범 자리에서 밝힌 내용이다. 또한 정부는 올해 말 ‘안전산업 육성 종합계획’을 발표하여 재난안전 관련 분야를 신산업으로 키우려는 욕심도 내고 있다. 지난 2년을 되돌아보건대,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란 기존에 공공성이 보장되었던 분야(혹은 보장되어야 하는 분야)에 대한 ‘창조적인’ 규제완화, 민영화와 같은 말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고용률을 앞세운 ‘저질’ 일자리의 확대

두 번째 대응은 ‘고용률 70퍼센트’ 달성이다. 박근혜 정부의 고용률 70퍼센트 정책은 ‘내수 활성화→성장률 제고’를 위한 핵심 전략이자 고령화 시대 노동력 부족에 대비해 청년, 여성, 고령인구 등 모든 인력을 활용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들어 고용은 양적으로 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2년 64.2퍼센트, 2013년 64.4퍼센트이던 고용률은 2014년 65.3퍼센트, 2015년 66.2퍼센트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에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던 중장년층, 여성이 취업자로 이동하면서 고용률과 함께 경제활동 참가율도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고용률 제고가 내수 활성화 및 경제성장이라는 선순환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양적인 확대에도 불구하고 실제 늘어나는 일자리는 저질의 시간제 일자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현재 200만 명을 돌파한 시간제 노동자(주 36시간 미만 일하는 노동자)는 월평균 66만 2000원밖에 안 되는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대다수가 건강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고용률의 상승은 기본적으로 소득불평등과 빈곤의 감소에 기여한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서는 고용률 증가에 따른 소득불평등 감소 효과가 미미한 수준이었다. 새로 늘어난 일자리의 대부분이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소득불평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바로 ‘노동소득 불평등’이다. (이병희, 「2000년대 소득불평등 증가요인 분석」, 『경제발전연구』 , 20권1호, 2014) 노동시장에 만연한 저임금, 비정규직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일자리의 양적 확대만을 중시해서는 의미있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시간제 일자리의 확산과 함께 기존 일자리에서도 유연근무제, 시간선택 근로가 장려되고 있다. 이에 더해 고용노동부가 조만간 발표할 예정인 ‘비정규직 종합대책’에는 파견업종의 확대, 비정규직 고용기간 확대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져 노동유연화와 일자리의 하향평준화는 한층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자본의 변화에 맞설 운동의 전략을 만들어야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경제민주화, 복지, 고용 등 이전까지 진보진영의 담론이던 것들을 변형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전략을 취해 왔다. 그러나 당선 이후의 행보를 보면, 그것이 그저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별 내용도 없이 말만 요란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가계소득 증대세제’의 이면에서 노동기본권에 대한 공격과 복지공약 후퇴가 계속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고성장을 지속하기 어려워진 재벌에 새로운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방안을 찾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신성장동력을 찾아 국가경제의 성장세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려는 정부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관리 전략은 성공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삶을 더욱 괴롭게 만들고 있다. 노동자들의 역할은  저질의 일자리라도 감사히 여기며, 경기 활성화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소비하는 것뿐이다. 2015년에는 본격화된 재벌의 위기를 내세워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압박이 더욱 거세어질 것이다. 구조개혁에 따른 공적서비스의 파괴(영리화),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 저임금 일자리의 보편화와 소득격차 확대에 대응하는 사회운동의 전략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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